별이 흘린 눈물의 강은 슬프지 않다
나무숲을 걷는다
저녁이 찾아오는 짙은 나무숲이다
바람은 늦고 무거웠다
나무 숲 언덕너머로 푸른 눈물이 마르지 않는 수채화처럼 옅게 물들어있다
나는 숲길은 걷는다
숲은 말이 없었고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만 들려온다
언덕너머에는 일찍 길을 떠난 별들이 잠들어있다
잠든 별의 심장소리는
눈이 먼 젊은 수도사의
기도소리
나의 기도는 지금 어느 곳에 머무르고 있나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은
어느 길을 걷고있나
별이 흘린 눈물의 강은 슬프지 않다
강에 배 띄워 흐르는 데로 몸을 맡긴다
그 강, 이 시간이 덧없지만 아름답다
나의 시간이 멈추는 그때
강이 들려준 기도를 기억한다
강이 혼자 읊조렸던 기도를
이제는 알 수 있으리라
언덕너머 강으로 가는 길을 걷다
나는 조용히 두 손을 잡는다
(한희원의 시 –별이 흘린 눈물의 강은 슬프지 않다-전문)
무수히 많은 생을 견디며 점점으로 새겨진 기억들. 어느 순간 불현듯 또렷하게 떠오르기도 하고 영원히 기억 저편으로 묻히기도 한다. '불현듯'이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일까? 실체도 없이 숨죽인 채 자리 잡고 있다가 문득 잊혀 진 기억에서 현실로 소환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감춰진 기억 속에는 나도 모르는 그리움이 존재하고 있다.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 처음 와 본 듯 생소한 곳이지만 흐릿하게나마 발걸음을 한 것 같은 장소. 이유도 없이 가슴을 아리게 하며 내 존재를 흔드는 바람 같은 것. 그리움!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중략)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뇨" 청마 유치환의 시 '그리움'의 일부이다. 어린 시절 청마의 시를 처음 대면했을 때의 가슴 떨림. 시인을 꿈꾸게 했던 청마의 시구가 아직도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남아있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로 시작되는 '바위'라는 시를 처음 접했을 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향수로 나를 이끌었다. "비와 바람이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이 구절은 어찌할 수 없는 그리움이 견고하게 쌓여 산화되어 가는 생의 비장함마저 던져주었다.
오늘은 광겁을 견디며 만들어진 암석의 동굴 도시 우플리스치헤(Uplistsikhe)를 찾아 가는 날이다. 수천 년 전 바위로 된 산을 깎고 깎아 도시를 형성했던 옛 조지아 사람들. 그들도 바위를 깎으며 억년 비정의 함묵을 안으로 채찍질 하였을까? 그들이 남긴 신화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우플리스치헤를 향하는 마음은 거대한 침묵의 신화를 향해 가는 탐험가 같은 심정이었다.
우플리스치헤는 트빌리시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그곳을 가려면 구소련의 지도자였던 스탈린의 고향인 고리를 거쳐 가야 한다. 고리에서 우플리스치헤는 차로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고리와 우플리스치헤는 현재의 역사와 고대의 역사를 만나는 교차점에 있다. 인류의 역사를 뒤흔들었던 공산정권의 지도자의 생애를 볼 수 있는 스탈린 박물관과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암석 도시를 한나절 동안 구경할 수 있다. 암석의 나이에 비하면 찰나이겠지만 도시를 걷다보니 타임머신을 타고 미지의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스탈린은 조지아의 작은 소도시 고리(Gori)에서 태어났다. 1879년에 태어나 1883년까지 지냈으니 기억에도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으리라.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후 고향 출신들을 핍박하였다고 하니 그에게 변방 출신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고리는 1989년 구소련의 붕괴와 조지아의 독립운동 시절 스탈린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폐쇄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스탈린 박물관이 있어서 관광 명소로 탈바꿈 했다. 1950년대 건립되어 처음에는 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스탈린을 추모하기 위해 변경되었다. 고리시내 중앙 광장에 위치해 있어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 고리시는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고, 하얀색의 건물들은 세월의 때가 묻어 회색빛으로 변해 마치 무채색의 도시 같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과 햇살만이 이 도시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박물관은 고딕양식의 기둥을 한 중후한 모습이었다. 지붕 끝에서 조지아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며 으스대고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는 녹색의 기차가 세워져 있었다. 생전에 스탈린은 비행기 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방탄 소재로 만든 최고급 기차를 이용했다. 1941년부터 사용한 이 기차는 무게가 83톤에 달한다. 스탈린이 얄타회담 장소로 갈 때도 이 기차로 이동을 했다니 우리 조국의 분단을 결정했던 회담을 생각하니 역사의 비정함이 전해온다.
박물관 앞에는 스탈린의 생가 모형이 박스로 제작된 조형물 속에 들어있다. 입구에는 붉은 밧줄로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덩치가 제법 큰 개 한마리가 개의치 않고 안으로 들어가 마루 위에서 한가롭게 잠을 자고 있었다. 권력의 부질없는 영욕이 스쳐가는 풍경이다.
박물관 안에는 스탈린의 어린 시절, 청년 시절, 레닌과의 만남, 공산당의 지도자로 활동했을 때의 자료들이 연대순으로 진열되어 있다. 스탈린의 젊은 시절 모습이 많이 야위어 보여 예술가 분위기를 풍겼다. 권력을 향할수록 점점 권위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중국에서 선물로 보내준 붉은 휘장의 한문 글씨가 보였다. 마지막 방에는 스탈린의 데드마스크가 붉은 천 위에 누워 있었다. 오랫동안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스탈린. 그의 영혼은 지금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이렇게 누워 있으려고 바람 같은 권력을 그렇게 탐했을까?.....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12. 산악마을 ‘우쉬굴리’를 향하여(하) 존재로서의길과 나뭇잎/ 바람과 초원/ 그와 같다나는 너를 느끼고/ 네가 나를 느끼는/ 자유로움나의 전부를 내 보이고/ 너를 아는 것/ 그 존재로서의 (한희원 작 ‘존재로서의’)슬픈 영혼을 찾는 조지아 민요 술리코를 가슴에 담고 메스티아와 우쉬굴리 그 먼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쉬굴리는 메스티아를 거쳐야 갈 수 있다. 트빌리시에서 메스티아까지 가는 교통편은 버스와 기차 또는 비행기가 있다. 조지아는 비행기가 대중화된 이동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가 운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한다면 밤 기차 행을 추천한다.트빌리시 중앙역에서 밤 9시쯤에 기차를 타면 2~4명이 탈 수 있는 침대 열차가 있다. 이 열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밤새도록 산악지역 작은 마을의 전설을 휘감은 채 몸을 누인다. 우리는 침대칸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부르는 술리코를 듣고 다른 칸에 있던 여행자들이 우리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박문옥의 노래가 지친 여행자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9시에 출발한 밤 기차는 아침 6시에 조지아의 서부 도시인 주그디디에 도착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메스티아로 가는 마슈르카가 기다리고 있다. 만석이 되어야만 출발하는 낡은 미니버스 마슈르카가 여행자를 싣고 아침을 가르며 메스티아로 향한다. 우리는 더 멀리 있는 우쉬굴리에 먼저 가기로 했다. 슈카라 빙하(5,193m) 지역을 둘러본 후 메스티아를 여행하고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메스티아에서 우쉬굴리로 가는 길은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가는 험준한 길이었다. 빙하로 가는 대평원 위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두 시간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유럽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우쉬굴리였다. 이곳은 70여 가구에 200여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산과 들녘에는 자유롭게 방목하는 소와 돼지들이 인간과 함께 노닐고 있었다. 우쉬굴리의 정류소에서 여행자들이 만년설에서 시작한 개울 옆에 앉아 지친 몸을 누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숙소는 버스정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덩치가 큰 주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은 두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트빌리시에서 제법 비싼 돈을 주고 기타를 주문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딸은 박문옥과 화음을 맞춰가며 노래를 불러 주위를 즐겁게 했다. 마을을 산책하다 돌로 지은 이층집에 시네마라는 간판이 걸려있어 들어가 보았다. 우쉬굴리 출신 영화감독 ‘마리암 해치바니’가 연출한 ‘데데’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조지아영화로는 드물게 국제영화에서 상을 받은 영화인데 우쉬굴리의 사계절이 배경으로 나오는 슬픈 사랑의 영화였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여주인의 친언니가 감독이어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영화감독을 만난다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감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더분한 할머니가 계셨다. 화려한 영화계를 뒤로 하고 고향의 깊은 산속 마을에 정착한 마리암 여사의 삶이 오히려 영화 같았다. 그날 밤 동굴 같은 이층 돌집 영화관에 바람이 찾아들어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았다. 한참 영화에 빠져있는데 문이 덜컹 열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늙은 소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영화를 보니 우쉬굴리의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눈 숲에 갇힌 우쉬굴리.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은 차가웠으나 마음은 따뜻했다.다음날 설산 슈카라 빙하로 향했다. 걸어서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그날 메스티아로 나와야 해서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순간 영혼을 목마르게 한다. 중간에 지프를 먼저 가게 한 후 가을로 접어든 평원을 걸었다.바람과 풀잎과 개울이 침묵의 평원을 감싸고 있었다. 끝이 없는 아스라한 풀숲 사이를 따라 걸었다. 저 슈카라 빙하를 넘으면 수많은 역사를 함께 한 러시아 땅이다. 러시아의 문호들은 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 따뜻한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산을 넘었다. 평원이 끊기고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왔다. 여기서 빙하까지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산길에는 알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여행자를 위한 카페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류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신화를 향한 손짓이었다. 산길을 걷는 우리들의 영혼도 개울처럼 맑았다. 한참 산길을 오르니 하얀 고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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