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남구

새단장 한 광주 대표 누각, 내년에 아름다운 자태 뽐낸다

입력 2022.12.21. 18:12 박지경 기자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남구]⑫우리시대의 보물 희경루·끝
지금의 동구 광주우체국 자리 쯤
철저한 고증 거쳐 광주공원 중건
1451년 '광주목' 복권 기념 건립
'함께 기뻐하고 축하한다'는 의미
소실 전까지 수려한 풍광·자태에
'동방에서 으뜸가는 누'로 칭송
광주천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광주공원 끝자락에 내년 2월쯤 준공을 예정으로 희경루(喜慶樓) 중건을 위한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현재 공정대로 그려서 난간 등이 미완성 상태이고 옛정취를 살려보고자 광주천에 나무다리 등을 표현 해 보았다.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남구]⑫우리시대의 보물 희경루·끝

'(형조에서) 광주 사람인 전 만호(萬戶) 노흥준이 목사(牧使) 신보안을 시기하여 구타한 죄를 탄핵하여 아뢰기를, "보안이 무신년 봄에 흥준의 기첩(妓妾) 소매(小梅)를 간통했는데… '밤에 보안이 소매와 함께 방 안에 있더라'고 하므로, 흥준이 뒤를 밟아 쫓아가니, 소매는 창을 넘어서 달아나는지라, 흥준이 뛰어 들어가서 보안의 옆구리와 볼기와 무릎을 두서너 번이나 걷어차고 나갔는데… 이제 살피옵건대, 보안이 기생을 간통한 것은 비록 의롭지 못한 일이오나, 흥준은 저의 고을 원을 발로 차고 온갖 못할 말로 꾸짖었고, 또다시 그가 앉은 곳까지 바로 들어가서 때리려고 하다가 기생의 말림으로 그쳤으니… 죄를 다스려서 강상을 바로잡게 하소서… 형조에서 아뢰기를 (인민들의 고소 사건이) 잇달아 끊이지 않는다면 현관(縣官)이거든 속현(屬縣)으로 강등시킨다'고 하였는데, 흥준이 수령을 구타하고 모욕한 죄는 잇달아 고소한 죄보다 심하오니, 청컨대 광주(光州)의 관호(官號)를 강등시키소서.'

경찰 조서보다 뛰어나고, 판소리 '춘향전'만큼이나 재미난 이 글은 '세종실록' 47권에 실린 기사의 일부분이다. 무관 노흥준이 자기 기첩 소매를 간통한 현장을 적발해 지금의 광주(보통)시장 격인 목사 신보안을 사정없이 구타한 이른바 '강상(綱常)사건', 1430년(세종12)의 일이다.

그해 광주목(光州牧)은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된다. 광주는 백제의 '무진주(武珍州)'라는 이름에서 출발한다. 통일신라시대 9주의 하나인 무주로 큰 고을이었으나 목이 못된 반면 나주와 승주에는 목이 설치됐다. 그 이유로 광주가 후백제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라고 학계에서는 지적한다. 이후 광주는 현(海陽縣)에서 주(翼州)로, 목(光州牧)으로, 부(茂珍府)가 됐다가 다시 목(光州牧)이 되는 부침을 겪어왔다.

당초 '무(武)진주'에서 '무(茂)진부'로 '무'자가 바뀐 것은 고려 혜종의 이름이 '무(武)'여서 이를 피해 고친 피휘(避諱) 때문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10세기 광주·전남 일대는 해양도(海陽道), 전북은 강남도라고 불렸는데, 1018년(현종9)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강남'과 '해양' 두 도를 합치고, 큰 도시였던 전주와 나주 첫 자를 따서 '전라도'라 부르게 된다. 2018년은 정도 1천년의 해여서 광주광역시는 그 기념으로 '희경루(喜慶樓)' 중건사업을 시작했다.

광주천 중앙대교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광주공원 끝자락에 내년 2월쯤 준공을 예정으로 희경루(喜慶樓) 중건을 위한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희경루는 옛 광주목의 관아에 있던 누각이다. 누각의 실존은 기문과 그림, 지리지 등의 자료가 있지만 체계적이지 않아 정확한 연혁의 파악은 어렵다.

먼저 기문으로는 신숙주의 기문(1451)과 심언광의 기문(1536)이 전한다. 시문은 송순과 임제, 임억령 등의 5언시와 7언시가 남아있다.

다행히 그림이 한 점 있는데 1567년 연회를 그린 '희경루 방회도(榜會圖)'이다. 그밖에 여러 지리지, 광주읍지 등에 단편적인 기록이 전해진다.

먼저 신숙주의 기문이다.

'광주는 전라도의 큰 고을이다. 전에 공북루(拱北樓)라는 누가 주의 북쪽에 있었는데 허물어진 지가 오래 되었다.… 고을에 관유(觀遊·활 쏘는 모습을 즐기는)의 장소가 없을 수 없는데 하니… 마을 부로(父老)들이 '높고 밝으며 상쾌한 곳으로는 공북의 옛터만 한 곳이 없다' 하매… (그 자리에) 남북 5칸, 동서 4칸으로 장엄하여 동방에서 으뜸가는 누가 준공되었다. 동으로 길에 임하고, 서로 대숲이 보이고, 북에는 못을 파 연꽃을 심고, 동쪽에 사장(射場)인 관덕(觀德)의 장소로 만들었다.' 기문은 고을에 어질지 못한 사람이 있어 무진군으로 강등되는 불행한 일이 있었는데 필문 이선제 등이 간절히 상소해 임금께서 특명으로 옛 이름을 회복해 광주목으로 하도록 했다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요지는 전에 공북루가 있던 자리에 새 누각을 지어 희경루라 했는데 마침 그 해가 구타 사건으로 강등됐다가 복원된 지 꼭 20년 만이어서 겹경사가 났다는 얘기다.

이어 심언광의 기문이다.

'…신한(申翰)이 이곳 목사가 되어 오니 정사가 더욱 엄명하게 되었다. 2년이 지난 계사년(1533)에 누에 불이 나 타버렸다. 신한이 새로 짓기로 하여… 완도에서 목재를 구해 와… 이듬해 봄에 공사를 제도하여 수개월 지나지 않아 일이 이루어졌다.… 새 누각에 올라서 보면 엎드려 있던 것이 일어나고, 감추어진 것은 나타나고, 먼 것은 가까워지며, 산의 자태와 물빛, 아침의 반짝임과 저녁 그림자, 사시(四時)의 변천과 만상의 아름다움 등 무릇 한 고을의 뛰어난 경치를 앉아서 볼 수 있다. 누각이 일신되고 단청이 또 칠해지니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보고 놀라워하였다.…'

묘사가 뛰어난 이 글에서 첫 희경루는 소실되고, 84년이 지난 1534년 봄 새 희경루를 완공했음을 알려준다.

그 후 1567년(명종2) 광주목사 최응룡, 전라감사 강섬 등 5명이 같은 해의 과거에 합격한 지 20년 맞는 때를 기념해 희경루에서 동방(同榜) 잔치를 열었다. 그 계회(契會)의 모습을 그린 것이 '희경루 방회도'이다. 지면에 축대를 쌓은 평평한 대(臺) 위에 1층은 기둥을 세웠고 2층은 누를 올렸으며, 누마루에는 20여명의 사람들이 연회를 열고 있다. 주변에 광주목 관아 건물이 자리하고 동쪽 공간에 민가와 활터가 있었음을 그림은 보여준다. 이 그림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오늘에 전한다.

희경루방회도 (보물 제1879호,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이후 지리지와 읍지 등 관련 기록들을 종합하면 희경루는 정조 초기까지 '관덕정(觀德亭)'으로도 불렸다. 300여년이 흐르는 동안 또 다른 신축이 이뤄지면서 개칭됐는지, 활쏘기 관습 장소여서 희경루와 관덕정이 혼칭됐는지 알 수 없다.

희경루는 1866년(고종 3) 목사 안응수에 의해 한차례 중수를 거쳤는데(광주읍지), 그 뒤에 사라졌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1907년~1916년 사이 전국 읍성을 철거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때 광주읍성도 헐리고 신작로가 개설되는 사정과 맞물려 소멸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희경루는 어디에 있었을까. 자료 대부분이 '광주목 관아, 객사의 북쪽'을 지목하고 있다. 1879년, 1899년 각각 발간된 '광주읍지' 2개의 지도를 근거로, 객사의 위치를 지금의 충장로 '무등극장' 일대로 본다. 그 북쪽에 있었다는 희경루는 그러니까 충장로 2가 '광주우체국' 자리쯤이 되는 것이다. 이 추정은 극장과 우체국 주변이 옛날 사장(射場)이 있던 자리로 '사정리(射亭里)'라고 했던 점, 또 희경루가 관덕정으로도 불렸다는 사실과 잘 맞아떨어진다. 이런 사료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어 맞추면 희경루는 '광주우체국' 자리에 2층의 우뚝 솟은 건물로, 주변에 대숲과 연못, 사장을 갖추어 수려한 풍광과 자태를 뽐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중건할 것인가는 '희경루 방회도' 그림을 기초자료로 삼고, 여말선초에 창건된 남원 광한루,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청풍 한벽루, 섬척 죽서루 등 우리나라 보물급 대표적 누정을 본보기로 삼았다. 구조와 양식을 보면 정면 5칸, 측면 4칸에 장대석 기단을 놓았고, 누상주는 목재 원형 민흘림 기둥을, 누하주는 장주초석을 세웠다. 겹처마에 연등천정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에 양성마루로 싸 발랐다.

처마는 주심에서 2.5m를 내밀었다. 총사업비 60억여원, 부지면적 2천378.3㎡, 연면적 460㎡, 건축면적 230㎡(70평)이다.

대상지는 추정 원위치인 광주우체국과 아시아문화 전당, 광주공원, 제일극장, 사직공원, 풍암제 등 6곳을 후보로 살폈는데, 탁 트인 조망과 주위 경관과의 문제, 녹지와 조경시설이 가능한지 여부, 지가와 경제성 등을 두루 따져 '광주공원'으로 결정했다.

희경루는 기본계획을 세운 지 10년 만인 2020년 12월 첫 삽을 떠서 지난 6월 '상량고유제'를 지냈고, 내년 초 현판식만을 남겨놓고 있다. 상량(上梁)은 전통건축물의 가구(架構)에서 최상부의 부재인 종도리를 올려놓는 공정으로 건물 골격이 완성된다는 의미이고, 고유(告由)는 중대한 일을 치르기 전에 그 사유를 종묘와 천지신명께 알리는 일이다. 상량문은 누의 건립과 소실, 중건까지의 연혁과 광주공동체의 의와 예, 풍류와 멋이 희경루를 통해 널리 퍼져나가기를 축원하는 뜻을 담아 천득염 희경루 중건 자문위원장(한국학호남진흥원장)이 지었다.

신숙주가 '동방에서 으뜸가는 누'라고 찬했던 '희경루'의 웅장하고 빼어난 자태가 광주공원 한 가운데서 제 모습을 이뤄가고 있다. '광주목의 희경루'가 50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광주광역시 희경루'의 이름으로 재탄생하는 일은 '희경'이라는 이름 그대로 '함께 기뻐하고 경하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희경루가 시대는 다르지만, 우리의 얼을 담아 후대에 남기려는 정성 어린 마음은 같다. 그것은 광주를 상징하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보물이 될 것이다.

송순의 '면앙집'에 실린 '광주 희경루에 차운한 시(次光州喜慶樓韻)'. 구름은 서석산에서 먼 산으로 흩어지고/ 얼굴에 부는 바람 객의 마음을 달래주네/ 눈에 비친 석류꽃 비가 그친 뒤에 곱고/ 맑은 날 좋아하는 비둘기 주렴 밖에서 노래하네/ 높은 정은 산 아지랑이 밖에 부치고/ 맑은 생각은 섬돌가 대나무를 따르네/ 난간을 치며 노래 부르니 시상이 절로 우러나/ 다시금 시원한 달빛 뜰에 가득함을 바라보네.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남구편' 연재를 마친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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