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남구⑥] 사직동 사동·구동·서동
광주천은 무등산 장불재 관목 숲의 작은 샘에서 발원한다. 이 물이 용추계곡으로 흘러 용추폭포로 낙하하고 제2수원지에 모인다. 물은 다시 남문로를 따라 북서진하면서 녹동역 소태역을 지나 흐른다. 중머리재의 증심사 계곡과 새인봉의 약사계곡을 내려와 합쳐진 또 하나의 물줄기가 의재로를 지나 학동으로 내려온다. 장불재에서 나온 물이 주류(主流)이고, 중머리재에서 나온 증심천이 지류(支流)인데 두 물은 원지교에서 하나가 된다.
광주천은 서북쪽으로 흘러 도심을 활 모양으로 관통하면서 양동 복개시장 밑에서 동계천과 만난다. 동계천은 장원봉을 출발해 지산동 동명동 계림동을 거쳐 내려온 지류다.
이 물들이 모여 큰 호수를 이룬 곳이 경양방죽이었다. 축구장 약 20개 규모의 경양방죽은 호남 최대의 인공호수로 작은 섬이 2개 있었고, 팽나무 왕버들 귀목나무 같은 고목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여름에는 뱃놀이를 하고 겨울에는 썰매를 타던 시민들의 사랑받는 쉼터였다.
일제는 늘어나는 일본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1935년 전면 매립계획을 세운다. 이때 시민들이 '경양방죽 매립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 투쟁에 나서는데 위원장이 그 유명한 광주의 성자 최흥종 목사였다. 투쟁 덕분에 당초 전면매립에서 1/3 정도를 남기는 부분매립으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작은 경양방죽은 오염이 심해져 저수지 기능을 상실했다.
1966년, 광주시는 남은 방죽마저 매립을 결정한다. 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시는 중심도로인 금남로를 당시로선 파격적인 8차선으로 확장하려 했는데 정부가 '광주 같은 작은 도시에 왕복 8차선이 가당키나 하나'면서 예산을 주지 않았다.
광주시는 태봉산을 헐어 경양방죽을 매립했다. 그렇게 새로 생긴 땅을 계림동 신시가지로 분양했고, 1968년 그 돈으로 금남로 확장공사를 했다. 이듬해 광주시는 매립된 방죽 위에 시청을 지었다. 2011년 인근에 '경양방죽 둑방길(일명 개미길)'이라는 산책로가 조성되면서 경양방죽은 이름만 남았다.
또 하나의 물줄기가 북에서 내려오니 서방천이다. 서방천은 문흥동 대치골에서 발원해 남서진 하다가 일곡동 일곡제골에서 출발한 용봉천과 하나가 되어 광주 북부의 너른 들을 적시며 내려온다. 서방천은 임동 무등경기장을 돌아 흐르다가 광주천에 합류한다.
광주천은 광주의 진산 무등산에서 사방팔방으로 발원한 수많은 물줄기들을 활처럼 휘어 흐르면서 모두 받아들이고는 지금의 상무대교 앞에서 극락강과 합류하고, 극락철교를 지나면서 영산강이 된다.
광주천은 광주역사의 모태다. 1919년 광주의 첫 3·1운동,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행진, 1980년 민주주의 항거 등이 모두 광주천을 배경으로 펼쳐진, 정의와 낭만과 서정이 깃든 물길이었다. 그 행로가 대략 18㎞에 이른다. 광주천이 흘러 학동 지나고, 양림동 지나고, 금교에서 광주대교까지의 서편구역, 공원과 향교가 있어 가장 고색창연한 동네인 남구 사직동이 있다.
사직동은 사동, 구동, 서동 3개의 법정동이 있다. 사직공원과 광주천변의 사동, 광주공원과 광주천변의 구동, 사직공원과 광주공원 서편의 서동이 사직동 구역이다. 사직공원이 있는 사직산(109m)에서 광주공원 성거산(60m)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중심으로 북동쪽에 광주천과 나란히 사동과 구동이 자리하고 반대편이 서동이다.

사동(社洞)은 사직단이 있는 사직동(社稷洞)을 줄여 부르는 이름이다. 사직은 '종묘사직(宗廟社稷)'에서 나온 말로, 종묘는 조선시대 선왕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고 사직의 사(社)는 국토를, 직(稷)은 오곡을 뜻하며, 사직단은 두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단이다. 국토와 오곡은 나라와 백성의 근본이므로 삼국시대부터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사직단을 설치해 왕이 제사를 올렸다.
지방에서는 왕을 대신해 성주가 제주가 됐으므로, 광주는 목사가 제를 주관했다. 사직단은 종묘와 함께 신성시돼 '종사(宗社)'라고도 하며, 조정의 중신을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 부르기도 했다. 역사드라마에 '종사가 평안하다'거나 '사직이 위태롭다'는 말로 흔히 등장한다.
봄에 두 번, 가을과 겨울에 한 번씩 매년 네 차례 사직제를 올렸는데,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재래의 문물이 숱하게 사라진 갑오경장(1894) 이후 폐지됐다. 사동 177번지의 사직공원은 1924년 일본의 태자(소화)의 결혼기념을 위해 조성해 처음에 '신공원'이라 했다가 해방 이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사직단은 구한말에 군사훈련장으로 쓰이다가 동물원이 들어서면서 사라져버린 것을 1993년 광주시가 복원했고, 이듬해 100년 만에 사직제가 부활됐다.
옛 사동지역은 동북으로 광주천이 불로동과 경계를 짓고, 남쪽은 양림산 줄기로 양림동과 나뉘며, 서쪽은 사직산 줄기를 따라 서동과 구분되고, 북쪽은 서현교회 서오길을 따라 구동과 갈라진다.
광주천을 굽어보는 성거산 북단에는 한말 때 참봉을 지낸 광주의 거부 정낙교가 세운 양파정이 있다. 양림파출소 옆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이 정자는 1914년에 지은 것으로, 운남 정봉현(극작가 김우진의 장인)의 기(記)와 30여개의 시문이 걸려 있다.
기록에 따르면 '양파정'은 조선 초기 '석서정(石犀亭)'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석서는 '돌로 깎아 만든 물소'라는 뜻으로 수마(水魔)를 제압하기 위해 정자를 지었다는, 목은 이색이 쓴 기문이 '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구동체육관으로 우리 기억에 남아있는 구동(龜洞)은 광주천 남쪽의 언덕이 거북 형상을 하고 있다 해서 구강(龜岡) 또는 성구등(聖龜嶝)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거북의 머리는 90년대까지 안중근 의사의 비가 있던 자리이며, 서오층석탑이 서 있는 자리가 거북의 목이고, 현충탑이 있는 곳이 거북의 등, 그리고 동으로 어린이 놀이터, 남으로 광주향교 뒤편, 서로 옛 활 터, 북으로 실내체육관이 거북의 네 다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 거북은 북쪽으로 고개를 빼고 나갈 형상이라서 사람들은 그렇게 되면 광주의 복이 달아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비보사찰인 성거사(聖居寺)를 세우고 거북 목덜미에 석탑을 눌러 세워 거북이 광주를 떠나지 않고 지켜줘서 오늘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믿어왔다.
1961년 해체 복원하면서 발견한 사리장치와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성거사의 창건은 고려 초기로 본다.
구동의 성거사지 석탑과 광주향교를 비롯해 서현교회, 사직단과 사직공원, 양림동 광주기독교 선교지로 이어지는 코스는 전통문화와 신문화의 공존을 보여주고 있고, 광주의 중심공원으로서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던 곳이다.
성거산과 사직산 사이는 광주천이 굽이 돌면서 넓은 모래등을 형성해 강폭이 지금의 5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제는 1928년 광주천 직강공사를 벌이고, 천변도로를 놓으면서 대규모 택지를 조성, 시장 상가 공장 운동장 등을 설치했다. 1932년 옛 태평극장 건너편에 470칸 규모로 들어선 사정시장은 일제강점기 광주신사의 국폐승격으로 그 규모가 확장되면서 신사 앞 장터가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이전하게 되는데 그것이 지금 양동시장의 뿌리다. 시내 여러 곳에 흩어져 광주의 역사를 알려주는 옛 비석들은 1957년 광주공원 입구에 옮겼다가 1975년 다시 광주향교 앞으로 옮겨 세웠다. 이 공원에 1971년 시민회관, 1979년 무진회관이 들어섰고, 그리고 4·19기념탑과 1982년 종합체육회관 등이 들어서면서 거북은 머리 쪽에 많은 상처를 입고 본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서동(西洞)은 공원 서편 구릉지에 남동에서 북서로 길게 놓인 지형을 하고 있다. 서동은 원래 서당골이라고 불렸는데 일제강점기 서정(西町)으로 바뀌면서 서동이 되었다.
현 서현교회 자리는 1924년 서로득(西路得·본명 Swine Hart Marnine) 장로가 세운 향사리 교회가 있던 곳이다. 향사리 교회는 구정교회, 서동교회로 불리다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뀐 유서 깊은 곳이다. 이 교회 옆에는 역시 서로득 장로가 설립한 4년제 간이학교인 배영학교도 있었다.
서로득은 이화학당과 양림동 수피아여학교의 교사(校舍)인 윈스버로우 홀을 설계했고, 금남로 5가에 4년제 간이학교 숙명학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무등산과 시가지를 조망하기 좋은 언덕인 서동에는 1938년 광주측후소가 세워져 최초의 기상관측을 시작한 곳이다. 광주측후소는 1970년 광주관상대로, 82년 광주지방기상대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92년 광주지방기상청이 되었다. 그해 5월 운암동으로 옮기면서 54년간의 서동시대를 마감했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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