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남구

무엇이든 '광주 최초'··· 100년 근대 역사 자체이고 시작점

입력 2022.06.29. 19:14 이석희 기자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남구③] 남구 양림동<중>
운림·방림·덕림·유림과 함께 五林
목포서 영산강 거쳐 기독교 정착
변방 값 싼 땅에 교회·학교·병원
교육·의료로 헐벗은 민중 속으로
식민 도시화 아닌 계몽적 근대화
역사문화마을 담장허물기로 시작
양림동 오거리는 양림동의 대표 랜드마크 중 한 곳이다. 도시재생사업의 하나로 아름다운 한옥이 완공을 눈 앞에 두고있다. 커뮤니티센터 앞 버드나무는지난 1943년 학강초등학교에 심어졌으나 2015년 10월 태풍으로 쓰러져 고사위기에 있던 것을 양림동발전회원과 주민들이 남구청 지원을 받아 옮겨심어 지금은 상징목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림 김집중 작가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남구③] 남구 양림동<중> 

◆양림산 동남쪽 자리한 서민들 삶터

버드나무숲, 양림(楊林)은 광주 오림(五林)의 하나다. 빛고을은 무등산이 팔 벌려 품어 안은 너른 들과 비산비야의 구릉이 많아 예부터 곳곳에 숲을 이루었다. 운림(雲林), 방림(芳林), 덕림(德林), 유동과 임동의 유림(柳林), 그리고 양림이, 숲이 우거졌던 다섯 마을의 이름이다. 양림은 사직산과 양림산(109m)을 잇는 능선의 동남쪽에 자리한 서민들의 삶터였다. 이곳 언덕에서 바라보는 무등산의 자태가 빼어나 그 일출이 광주 8경의 하나로 꼽혔다.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산죽(山竹)으로 화살을 만들어 왕실에 바치는 일을 하며 살았다. 광주천에 물이 차오르면 도심과 단절되는 변방, 양림의 언덕은 병들어 죽은 아이들을 짚으로 싸서 나무에 달아 풍장(風葬)을 지내던 외진 곳이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개신교)가 들어온 것은 1884년, 140여년 전의 일이다. 그해 6월 미국 선교사 매클레이가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받으면서 시작된다.

양림동 5거리

20년이 흐른 1904년, 양림동에 기독교가 들어온다. 신문물은 대개 물길을 따라 유입되는데 목포에 뿌리내린 기독교가 영산강을 따라 올라오다가 광주읍성의 서남쪽 끝, 양림동에 정착하게 된다. 미국 남장로교 유진 벨(배유지), 클레멘트 오웬(오기원) 등의 선교사들이 그해 성탄절 첫 예배를 올리면서 광주 기독교는 첫발을 내디뎠다.

선교사들은 변방이어서 헐값이던 이 땅을 사들여 교회와 사택을 짓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면서 '서양촌'을 형성해 나갔다. 광주의 근대는 그렇게 식민지 근대보다 한걸음 앞서 들어왔다. 일제 강점기 들어 광주 도심이 조선총독부의 직접 영향을 받는 식민지 근대도시의 과정을 거치는 반면, 광주천 건너 양림동은 종교와 교육과 의료, 그리고 문화의 새싹을 틔운 계몽적 근대의 길을 걸었다.


◆예수 면류관 뜻하는 호랑가시나무

양림동의 근대 100년은 첫 예배가 열린 야트막한 양림산, 지금의 호남신학대학교가 자리한 언덕에서 시작된다. 그 아래로 내려가는 산길에는 유진벨 길, 오웬 길, 윌슨 길 등 수많은 선교사들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선교사 사택 가운데 일부는 한국전쟁 때 불탔고, 윌슨(우일선) 선교사의 사택이 남아 있다. 윌슨 선교사는 광주기독병원(옛 제중원) 2대 원장을 지냈다. 1910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축물이다. 고급 사교장으로 쓰이기도 하고, 한국전쟁 때는 고아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참나무, 팽나무, 흑호도나무, 은단풍, 백일홍 등의 고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사택 앞으로 수령 400년이 넘은 호랑가시나무(광주시기념물)가 유명하다. 잎의 가시가 늙은 호랑이 발톱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영어 이름은 '홀리(Holly)'.

가시는 예수의 면류관을, 열매는 예수의 피를 의미한다 하여 기독교에서 성스럽게 여긴다. 할리우드(Hollywood), 할리스커피(Hollys Coffee)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일선 사택 북쪽 언덕을 오르면 선교사 묘원이 있다. 1909년 숨을 거둔 오웬, 유진 벨, 윌슨 선교사 등이 묻혀 있다. 광주에서 생을 마감한 선교사 22기, 서울 선교사 묘역에서 이장해온 23기가 더해져 45기가 안장돼 있다. 1914년 지어진 네덜란드식 회색벽돌건물 '오웬 기념각'은 기독간호대학 교내에 있다. 광주 최초의 음악회와 연극 무용 등이 공연된 서양문화의 산실이었고, 광주 YMCA가 창립된 곳이기도 하다.

선교사들은 교회를 짓고 교육과 의료를 통해 헐벗은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당시 여학교로는 광주여학교를, 남학교로는 숭일학교를 세웠는데, 여학교를 세운 자체가 파격이었다. 광주여학교는 1911년 재니 스피어(Speer)의 언니가 헌금한 자금으로 학교를 지으면서 그 이름을 딴 수피아 여학교로 개명했다. 교내에는 수피아 홀과 커티스 메모리얼 홀(1925), 윈즈버로우 홀(1927), 수피아 강당(1935) 등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 등록문화재로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숭일학교는 불령선인 양성소라 하여 1931년 중학교 과정이 강제 폐지되었고, 1937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소학교를 자진 폐교했다. 수피아 여학교도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숭일과 수피아의 신사참배거부는 학교에서 일어난 최초의 것으로 뒤이어 들불처럼 번지는 저항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1940년 조선총독부가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함으로써 학교는 폐쇄되었다가 해방 이후 다시 문을 열게 된다.

의료선교의 결실은 광주기독병원의 전신인 광주 제중원이다. 선교사들은 사택에서 진료를 시작해서 1905년 제중원을 열었다. 1911년 그라함기념 병원을 건립했고, 이듬해는 광주 나병원을 개원했다. 1995년 유진 벨 재단을 설립, 북한 결핵퇴치 운동을 벌인 인세반(스티브 린튼)과 인요한(존 린튼)이 유진 벨의 외손자이다.

양림동에 미국 선교사들의 근대 유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장우 가옥'과 '최승효 가옥' 등 우리의 전통 건축물도 있고, 시인 김현승(1913~1975)과 음악가 정율성(1914~1976)의 흔적들도 곳곳에 남아있다. 광주가 근대도시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숱한 영욕을 몸으로 겪어낸 보통사람들의 이야기가 양림동 골목마다 가득하다.


◆깨진 채 방치하면 다른 유리도 깨져

'광주 개화의 1번지' '근대 역사문화마을' '광주의 예루살렘' '광주의 몽마르뜨'…, 광주의 근대에서 '최초'는 대부분 여기서 출발하므로 양림동 앞에는 빛나는 수식어들이 붙어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니다. 1990년대 광주의 핫플레이스는 백화점이 들어선 광주천 너머 동구였고, 양림동은 1만명이 넘는 인구가 절반으로 줄고, 늘어난 빈 집에는 유흥업소와 술집과 PC방들이 들어차는 옛 마을이었다.

"문근영씨 엄마가 사직도서관장 하실 때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나무가 입구를 막고 있어서 나무를 벤다는 거예요. 그 나무가 100년이 넘은 플라타너스입니다. 부랴부랴 달려가서 설득하고 애원해서 살려놓은 겁니다." 호남신학대학 송인동 교수의 말이다.

"양림동이 어떤 동네인데 이렇게 놔둬서는 안 되겠구나"하는 자각이 밀려왔다. 뜻있는 동네사람들을 모으고 민관이 함께하는 워크숍을 열어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가꾸기'사업을 시작한 것이 1998년. 그때 '담장 허물기' 제안이 나왔다.

양림동 커뮤니티센터 앞 버드나무

"모든 일은 자기희생에서 출발해야 하는 거잖아요? 교회와 기독병원부터 담을 헐어야, 남들도 따라 할 것 아니겠어요? 발이 닳도록 찾아가서 설득하고, 병원장이 바뀌면 또 찾아가서 설득하고 노력했는데 병원에는 산소공급시설이 있어서 개방이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남구청이 지원을 약속하면서 2005년, 병원 설립 100주년을 맞은 그해 기독병원의 시멘트 담장이 철거되었다. 이듬해 광주양림교회의 담장이 허물어지고, 도서관과 동사무소의 담장이 무너지고, 여기에 동참하는 주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담장이 사라진 열린 공간에 사람들은 화분을 내놓았다. 쌈지공원이 생겨나고, 광주천으로 생태통로가 연결되면서 마을은 푸르른 생기를 되찾았다.

2013년 화재로 방치된 주택의 쓰레기를 주민들 스스로 치우면서, 그 골목 담벼락에 옛 물건들을 내어 작은 정크아트 전시장을 만들고, 뒤뚱거리는 동네 어르신들의 걸음걸이를 빗대 '펭귄마을'이라고 이름 붙여, 지금은 관광골목이 된 것도 이 작은 운동, '담장 허물기'의 깨달음이 가져다 준 산물이다.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다른 유리창도 깨뜨려져서 결국 슬럼가가 된다는 미국의 범죄학자 조지켈링의 '깨진 유리창 이론'의 반면교사를 펭귄마을은 보여준다.

그들은 이야기에 주목했다. 양림동이 간직한 근대 100년의 반짝거리는 이야기들을 '스토리텔링'으로 구성하여 문화 해설사들을 양성해 나갔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따라 걷는 길을 만들고, 2007년 20곳을 선정하여 그 길을 찾아가는 문화지도를 만들었다. 그 노력들은 빛을 발했다.

양림동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오랜 기억 속에서 부활했고, 사람들은 양림동을 찾기 시작했다. 양림동은 지난 100년의 근대 옛 이야기, 쇠락한 동네에서 다시 태어난 부활의 이야기, 그렇게 2개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마을이 되었다. 양림동의 마을가꾸기 사업의 성공모델이 되어 인천배다리 마을 등 타 지역에 노하우를 전해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송교수는 "양림동의 정신은 같은 것이 아닌 다른 것, 안이 아닌 외부의 것들을 받아들이고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시켜 나가는 개방성과 다양성"이라면서 "평등과 사랑의 기독교 정신이 의를 숭상하는 선비정신과 어울리면서 광주정신의 뿌리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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