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易地思之'] 왜 한국 정치는 4류일까?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입력 2022.12.27. 10:07

만약 한국 정치가 4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실패했거나 실패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면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상상력의 빈곤'을 들고 싶다

지금 당장 유·불리의 얄팍한 계산만 있을 뿐,

멀리 내다보는 법은 없다. 시야는 10미터다

내일도 없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도 열흘 전까지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저지르는 내로남불은

정치인들이 인성이 나빠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열흘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을 못하기 때문이다

싸움이 벌어지는 좁은 공간을 벗어나 크게

생각하고 이 나라와 국민의 삶과 미래를 생각하는

상상력 경쟁을 하면 좋겠건만 그런 법은 없다

"상상력은 모든 인간 행동의 위대한 원천이며 진보의 주요한 근원이다."(듀갈드 스튜어트) "과학자는 강렬한 직관적 상상력을 지녀야 한다."(막스 플랑크) "과학에서의 모든 위대한 진보는 새롭고 대담한 상상력에서 나왔다."(존 듀이) "상상력이 지식보다 더 중요하다."(앨버트 아인슈타인) "상상력이야말로 인류 최대의 혜택이다."(알렉스 오스본)

상상력을 예찬하는 명언은 무수히 많지만, 이상 소개한 5개 정도면 상상력의 중요성을 인증하는 데에 충분하리라 믿는다. 그런데 그 중요성을 빼곤 상상력은 자주 오해되는 개념이다. 상상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오해가 가장 심한 것 같다. 스위스 작가 롤프 도벨리가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잘 지적했다.

"많은 사람들은 와인 한 잔으로 이성적 사고를 약간 늦출 때 상상력이 발동하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이미 생각했던 것들 외에 나올 것이 없다. 상상은 가능한 결과들을 끝까지 집중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상상력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짜내서 말이다. 그렇다. 상상은 힘든 일이다."

또 하나의 오해는 상상력이 필요한 분야에 관한 것이다. 과학·예술·대중문화·기업 분야에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외쳐지고 있는 반면, 정치·리더십·사회운동·안전 분야에선 상상력의 필요성을 말하는 데 매우 인색한 편이다.

이미 500여년 전 마키아벨리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걸 상기해보기로 하자. "군 지휘관으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상상력이라고 대답하겠다. 하기야 이 자질의 중요성은 군 지휘관에만 한한 것은 아니다. 어떤 직업이나 상상력 없이 그 길에서 대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지역사회 조직가인 사울 알린스키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한때 나는, 조직가가 필요로 하는 기본적 자질은 불의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분노할 줄 아는 감각이며, 이것이 그를 유지시켜 주는 근본적 욕구라고 믿었던 적이 있다. 이제 나는 기본적 자질이 분노가 아니라 상상력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케네디는 상상력을 진보를 위한 필수 요소로 지목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세상의 문제들은 아마 명백한 현실에 의해 시야가 제한받는 회의론자들이나 냉소주의자들의 힘으로는 풀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것들을 꿈꿀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테러 등과 같은 참사나 경제위기는 어떤가. 미국 국가안보회의는 정부가 2001년 9·11 테러 공격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상상력의 실패'라고 결론내렸다. 그래서 이후 미국 정부는 테러리스트들의 추가 도발을 예측하기 위해 SF소설 작가,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 미래학자 등 창의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모았다. 또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은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하지 못한 이유를 '상상력의 총체적인 실패'라고 했다.

정치, 특히 한국 정치는 어떤가? 삼성 회장 이건희는 1995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했다. 이 발언에 반발한 사람들도 없진 않았지만, 생산성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던 정치에 염증을 느낀 시민들 중엔 동의하는 이들이 많았다. 아마 지금 물어봐도 동의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아닐까 싶다. 만약 한국 정치가 4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실패했거나 실패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면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상상력의 빈곤'을 들고 싶다.

네덜란드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는 "우리는 물 한 방울을 보면서 바다를 생각할 수 있다"고 했건만, 다수 정치인들은 매일 물을 마시면서도 민심의 바다를 생각하는 법을 모른다. 선거가 끝난 후에야 선거 결과에 대해 "민심의 바다가 무섭다"는 따위의 말을 하곤 하지만, 영혼 없는 헛소리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중요한 건 평소 실력인데, 선거가 아닌 평소에 다수 정치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력자들과 강성 지지자들이기 때문이다.

늘 국민적 원성의 대상이 되고 있는 당파적 싸움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싸움의 콘텐츠가 너무 사소하고 몰상식하고 저급하다는 게 문제다. 지금 당장 유·불리의 얄팍한 계산만 있을 뿐, 멀리 내다보는 법은 없다. 시야는 10미터다. 내일도 없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도 열흘 전까지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저지르는 내로남불은 정치인들이 인성이 나빠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열흘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을 못하기 때문이다.

적을 공격할 건수만 생겼다 하면 폭격을 퍼붓는 데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과장과 왜곡은 기본이고 심지어 가짜뉴스까지 만들어내고야 만다. 책임을 지는 법은 없다. 부도덕하고 기만적인 공격을 할수록 자기 진영에선 더 큰 박수를 받는다. 후원금도 더 많이 쏟아지고, 차기 공천 가능성도 훨씬 높아진다. 싸움이 벌어지는 좁은 공간을 벗어나 크게 생각하고 이 나라와 국민의 삶과 미래를 생각하는 상상력 경쟁을 하면 좋겠건만 그런 법은 없다. 어떻게 하면 적을 공격하는 데에 좀더 자극적이고 독한 언어를 구사할 것인가? 이걸 고민하는 데에만 상상력이 발휘되고 있을 뿐이다.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가야트리 스피박은 "훈련되지 않은 상상력이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걸 사이버공간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적했는데, 이는 한국정치의 주요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정치인들이 양산해내는 그런 파괴적 상상력의 결과물을 자상하게 보도해주는 언론매체들에게 요청하고 싶다. 매월 그 분야의 '톱 10' 정치인들을 뽑아 주요 발언 내용과 함께 발표해달라고 말이다. 물론 이는 민생에 도움이 되는 상상력 경쟁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정치인들이 반대편을 공격해서 권력을 잡는 정치보다는 상상력으로 세상을 좋게 바꾸는 실적으로 권력을 잡는 정치를 하길 바란다. 무능력하고 부도덕한 정치인일지라도 반대편 공격엔 탁월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생산적 상상력을 발휘하려는 정치인에겐 공적 이타주의와 더불어 피땀어린 집중의 노력이 필요하다. 후자보다는 전자의 정치인을 우대하는 현 풍토를 바꾸지 않는 한 한국 정치는 정말 4류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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