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의 신파와 미학 사이] 모방하는 예술과 응답하는 예술

@김상봉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입력 2022.10.18. 08:14

서양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미메시스',

즉 모방하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라고

생각해 왔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예술적

모방을 거울의 반영 같은 것이라면서,

예술이 보여주는 것이 존재의 진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영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후세의 사람들이 모두 그런 식으로

예술적 모방을 생각한 것은 아니어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많은 사람들이 존재의

진리를 미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예술의 일이라 생각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하이데거와 루카치는

시대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사람들이었으나,

모두 예술을 모방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 모방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달랐을 뿐,

예술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의

진리를 모방하고 반영한다고 생각한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10월은 1948년 여순사건이 일어났던 달이다. 이 사건은 같은 해 4월 3일 일어난 제주4·3사건을 당시 정부가 수습하기보다는 확산시켜, 좌익세력을 뿌리뽑겠다는 일념으로 본격적인 민간인 학살의 길로 들어선 뒤에, 제주에 있던 군인과 경찰만으로는 병력이 부족하여,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14연대에게 제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14연대 장병들이 그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반란을 일으켜 시작된 사건이다. 19일에 시작된 반란 자체는 27일에 진압군이 여수를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끝이 났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해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따질 생각은 없다. 그때는 우리 겨레가 남과 북, 좌와 우 가릴 것 없이, 복음서의 표현으로는 '군대 귀신'이 들려 있던 때였고, 만해의 표현으로는 오로지 '남에게 대한 격분'에 사로잡혀 있던 때였다. 물론 아직 백범 김구 같은 예외가 있긴 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남에 대한 격분에 사로잡혀 있는 군대 귀신들을 잠재우기에는 너무나 미약했다. 이승만 정부는 14연대의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남로당 토벌을 핑계로 민간인 학살의 길로 치달았는데, 그 광란의 지옥에서 총탄에 스러져가면서도 노래를 부른 아가씨가 있었다 한다.

그 노래, '산동애가'는 1961년 가수 지화자씨가 불러 세상에 알려졌다. 4분의 4박자 전형적인 트로트 곡인데, 1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 놓고/까마귀 우는 곳을 멍든 다리 절며 절며/다린 머리 쓸어안고 원한의 넋이 되어/노고산 골짝에서 이름 없이 쓰러졌네". 가사의 작사자 정성수는 놀랍게도 여순 사건 당시 진압에 참여했던 경찰이었다. 그런데 이 노랫말에 얽힌 사연이 애절하다. 1948년 구례군 산동마을에 토벌대가 들이닥쳐 이른바 좌익인사들을 학살할 때, 백순례는 열아홉살이었다. 그런데 집안이 좌익으로 몰려 하나 남은 아들마저 죽을 위기에 놓였을 때, 백순례는 막내 오빠를 살려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대신 죽었는데, 그때 학살의 현장으로 끌려가면서 저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정말 그 아가씨 죽음의 자리에서 그 노래를 3절까지 지어 불렀을까? 그 노랫소리 너무 고와 그 처녀 앞에서 군인들은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총을 들었다 내렸다 했었을까? 그렇든 아니든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구례 산동마을 사람들은 그 노래를 백순례가 학살터에서 부른 노래라며 불러왔다 한다. 그리고 1960년 4월혁명으로 세상이 조금 밝아졌을 때, 정성수의 노랫말에, '대전 불루스'와 '댄서의 순정'으로 유명한 작곡가 김부해가 곡을 붙여 세상에 알려진 노래가 '산동애가'이다.

그런데 여순사건의 비극을 노래한 트로트 곡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건이 일어난지 1년 뒤 당대의 국민가수라 부를법한 인기를 누리고 있던 남인수는 김초향 작사 이봉룡 작곡의 '여수야화'라는 노래로 사람들을 울렸으나, 이승만 정부에 의해 한 달 만에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부를 수 없는 노래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또 다른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여수 블루스'가 그것이다. 1959년에 가수 이미자씨가 부른 '여수의 부루스'도 여순사건을 정면으로 묘사한 것은 아니지만, 그 비극과 무관한 노래로 들리지는 않는다. 한국의 대중가요는 그렇게 예술적인 방식으로 여순사건의 비극에 응답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양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미메시스', 즉 모방하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라고 생각해 왔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예술적 모방을 거울의 반영 같은 것이라면서, 예술이 보여주는 것이 존재의 진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영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후세의 사람들이 모두 그런 식으로 예술적 모방을 생각한 것은 아니어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많은 사람들이 존재의 진리를 미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예술의 일이라 생각했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예술의 본질은 "존재자의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정립하는 것"에 존립한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반 고흐가 그린 농부의 구두 그림 속에서 "전체로서의 존재자"가 은폐되지 않고 우리에게 열린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정반대의 자리에 있었으나 우리는 루카치에게서도 비슷한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가는 하이데거가 "전체로서의 존재자"라고 부른 그 진리를 '객관적 총체성의 세계'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예술이 그런 총체성의 심미적 반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총체성의 잣대로 올바른 예술과 퇴폐적인 예술을 나누고 비판하는데 지칠 줄 몰랐다.

엉뚱한 가정이지만, 만약 그들이 '산동애가'를 들었으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하이데거와 루카치는 시대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사람들이었으나, 모두 예술을 모방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 모방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달랐을 뿐, 예술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의 진리를 모방하고 반영한다고 생각한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산동애가'는 무엇을 모방하는가? 그 노래 역시 감정을 모방하고 표현한다. 그리고 야만적인 국가폭력의 참상을 폭로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 역시 모방하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그 노래는 백순례가 부른 노래라고 불렸으나, 실은 백순례를 위한 노래이다. 학살터의 총성과 함께 스러진 산동 백씨 집안 막내딸의 슬픔과 고통에 응답하고 그 원혼을 위로하는 노래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노래는 단지 모방하는 예술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예술이다. 금지곡이 될지언정, 위험을 무릅쓰고 타인의 고통에 용감하게 응답하여 부른 노래가 이 노래인 것이다.

루카치나 하이데거는 예술이 전체의 진리를 드러냄으로써 참된 세계가 계시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계시된 세계를 뭐라 부르든, 그리고 그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참되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념의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에 응답할 때 그 응답 속에서 사람과 사람의 인격적 만남이 일어나고 그 만남 속에서 현실적인 공동체가 열리기 시작한다. 오직 그런 만남의 공동체로서만 세계는 실제로 열릴 수 있다. 예술이 타인의 고통에 응답할 때, 예술은 만남 속에서 열리는 세계를 선구적으로 개방하는 실천이다.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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