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易地思之'] 가난한 유권자는 언론과 그루밍의 피해자였나?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입력 2022.09.06. 13:16

지난 대선에서 놀랍거나 이상하게

생각해야 할 일은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

민주당에 표를 준 사람들도 많았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이게 연구 대상이

되어야지, 자기 이익과 가치에 따라

민주당에 표를 주지 않은 저소득층

유권자들을 향해 언론이나 그루밍에

놀아난 게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하는 건

넌센스다.무엇보다도 선거 결과에 대한

내로남불 해석은 이제 그만 두자

우리편이 승리하면 유권자들의

위대한 저력을 과장하고 칭송하지만,

패배하면 우회적으로 온갖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관행을 중단하자

"고학력, 고소득자 등 소위 부자라고 하는 분들은 우리(민주당) 지지자가 더 많다. 저학력에 저소득층이 국힘(국민의힘) 지지가 많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언론 환경 때문이다." 지난 7월 29일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였던 이재명이 지지자들과의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서 한 말이다.

이에 같은 당 경쟁 후보인 박용진은 "오만함마저 느껴진다"고 비판했다. 그는 "저학력, 저소득층은 언론환경 때문에 국민의힘을 지지한다는 말은 너무나 노골적인 선민의식이고, 정치 성향에 따른 국민 갈라치기"라며 "국민 분열의 정치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아니다. 우리가 지향할 길은 국민통합의 길"이라고 반박했다.

또다른 당대표 후보인 강훈식도 "지난 대선 기간에도 우리 선거 캠프 인사가 윤석열 당시 대선 후보 지지자의 대부분이 저학력 빈곤층이라고 했다가 SNS 글을 지우고 사과한 적이 있다"며 "당시에도 우리가 폐기해야 할 민주당의 선민 의식을 보여줬었기에 많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는 "저들의 갈라치기와 혐오를 비난만 하지 말고, 우리에게서도 문득문득 등장하는 이분법의 정치를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전 법무부 장관 추미애가 8월 1일 이재명의 발언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부유한 사람들의 특권 유지 노력에 밀려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에서 멀어져 가고, 사회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자신들을 외면하는 세력을 지지하는 이율배반적 투표를 하고 있다"며 "심지어 (이런) 투표조차도 피해를 보면서 사회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도록 그루밍(심리적으로 지배함)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놀랍다. 유권자의 투표행태와 관련된 내로남불이 일부 민주당 지도자들의 마음 속에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는 게 말이다. 우리편에게 표를 주는 유권자는 정의롭고 현명한 반면, 반대편에게 표를 주는 유권자는 '언론 환경'이나 '그루밍'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보면 마음은 편해질지 몰라도 마음 편하자고 정치를 하는 건 아니잖은가.

저학력·저소득층이 보수정당을 지지한다는 이른바 '계급배반 투표' 현상은 이를 긍정하는 증거와 부정하는 증거가 병존하지만, 절반의 증거일망정 이색적인 뉴스가치로 인해 국내외 학계와 언론계 모두 이 현상에 주목해왔다. 그 이유를 두고 그간 많은 전문가들이 다양한 설명을 내놓았다. 이미 120여년 전 미국 경제학자 쏘스타인 베블렌은 [유한계급의 이론](1899)에서 가난한 사람에겐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이유를 제시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처절한 가난과, 자신의 에너지를 하루 하루의 생존 투쟁에 모조리 쏟아 붓는 사람들은 누구나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그들이 내일 이후를 생각하는 데 드는 노력의 여유 조차도 없기 때문인 것이며, 이것은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현재의 상황에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과 동일한 맥락인 것이다."

오늘날엔 이런 주장에 동의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게다. 물론 한국의 민주당 일각엔 비교적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말이다. 이후 세월이 흘러 '이익'보다는 '가치'를 중시하는 유권자들이 많다는, 훨씬 나은 설명이 제시되었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마](2004, 국내 번역·출간 2006)에서 "사람들이 언제나 단순히 자기 이익에 따라서 투표한다는 가정은 심각한 오해"라며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가치관에 따라, 그리고 자기가 동일시하고 싶은 대상에게 투표한다"고 정리했다.

미국 언론인 토마스 프랭크의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2004, 국내 번역·출간 2012)를 비롯하여 그런 논지를 펴는 책과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2012년 한국 대선을 분석한 정치학자 강원택도 저소득층 유권자들은 개인의 경제적 이해관계보다 사회문화적 가치를 중시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정당에 표를 주는 이유로 사회문화적 가치를 지적하긴 했지만, 사실 이건 하나마나한 이야기다. '이율배반'이니 '계급배반'이니 하는 지적도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이익' 중심의 투표를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자칭 진보 정당에 표를 줘야 할 이유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문재인 정권에서 일어난 부동산 가격의 폭등을 보라. 이는 집을 소유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실상의 약탈이었다! 사실 지난 대선에서 놀랍거나 이상하게 생각해야 할 일은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 민주당에 표를 준 사람들도 많았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이게 연구 대상이 되어야지, 자기 이익과 가치에 따라 민주당에 표를 주지 않은 저소득층 유권자들을 향해 언론이나 그루밍에 놀아난 게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하는 건 넌센스다.

애초에 이 논쟁의 방향 설정이 잘못되었다. 한겨레 기자 엄지원이 그 점을 잘 지적하고 나섰다. 그는 "(이재명) 발언의 전체 맥락을 보면, 정작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대목은 따로 있다"며 이재명이 "고소득층에 우리의 지지층이 있으니 그들을 배제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맺는 것이 옳으냐는 문제를 제기했다. 사실상 '서민정당'으로 자리매김해온 민주당의 무게추를 옮겨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놓은 것인데, 그래도 되는 건지에 대해 "더 날카로운 논쟁이 벌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는 것이다.

맞다. 바로 그게 쟁점이 되었어야 했다. 이와 관련, 나는 정당의 이념지향성을 '결과'가 아닌 '의도' 중심으로 평가하는 기존 관행을 의심해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의도'를 앞세워 사회를 실험실로 여기는 무모한 '도그마 중독증'이나 아마추어 근성과 결별하기 위해서다. 이는 2200여년 전 한비자도 간파했던 '상식'이다. "군주가 나라를 망치는 건 악의가 아니라 물정 모르는 의욕만 넘치는 열정과 선의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우리 모두 좀더 정직해질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선거 결과에 대한 내로남불 해석은 이제 그만 두자. 우리편이 승리하면 유권자들의 위대한 저력을 과장하고 칭송하지만, 패배하면 우회적으로 온갖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관행을 중단하자. 그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저소득층 유권자는 언론과 그루밍의 피해자였다는 주장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게 좋겠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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