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의 '신파와 미학 사이'] 드라마와 역사

@김상봉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입력 2022.05.31. 09:25

드라마의 보편적 공감 가능성은

드라마가 뿌리박고 있는 역사의

보편성과 무관하지 않다

역사가 없는 곳에는 예술도 없다

한국의 역사가 예술적 상상력의

비옥한 토양이 되고 마르지 않는 샘이

되는 까닭은 단지 그 역사가 남들이

갖지 못한 고유성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근·현대사는 세계사의

비극적 진리가 드러나는 장소이다

반전이 없는 드라마는 재미없다. 물론 반전이 재미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깨달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 깨달음이 단순한 발견이 아니라 윤리적 자각인 한에서, 드라마는 우리를 도덕적으로 도야하고 훈육하는 학교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드라마의 도덕적 역할이 이런 일은 해야 하고 저런 일은 하면 안 된다는 명령과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드라마로서도 실패한 것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도야의 관점에서도 도움이 못 될 것이다. 누가 뭐래도 드라마는 재미있어야 한다.

도덕적 명령은 추상적 법칙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드라마가 주는 깨달음은 이야기를 통해 주어진다. 이야기는 사건의 묘사와 재현이다. 그래서 훌륭한 드라마는 다른 무엇보다 재현되는 사건의 특별함을 통해 우리에게 재미도 주고 교훈도 준다. 물론 드라마가 재현하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이라면, 그것은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일 것이다. 드라마는 사실을 재현하되 일어나지 않았던 사실을 재현한다. 그런 한에서 드라마의 창작은 상상력의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무엇을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경험한 것을 가지고 경험하지 않은 것을 상상한다. 그런 의미에서 상상력의 범위는 경험의 범위에 연동되어 있다. 그러나 경험이 언제나 개인의 직접적 경험일 필요는 없다. 아니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기억도 동경도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나의 기억과 동경은 언제나 너의 기억 및 동경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상상력의 토양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너와 나의 공유된 기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공감의 토대이기도 하다. 만약 완전히 다른 역사를 산 사람들이 있다면, 각자의 역사에 뿌리박고 있는 드라마는 서로에게 이해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드라마의 보편적 공감 가능성은 드라마가 뿌리박고 있는 역사의 보편성과 무관하지 않다. 역사가 없는 곳에는 예술도 없다. 오직 비옥한 역사의 토양으로부터 아름다운 예술의 숲도 자라나는 것이다.

하지만 반전이 역사와 무슨 상관일까?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내 경우, '오징어게임'에서 기억나는 반전의 장면들 가운데 하나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사람들이 게임을 계속할지 말지를 두고 투표하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 예상치 못 한 반전에 너무도 놀랐지만, 동시에 이것은 작가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상상할 수 있는 반전이라 생각하고 깊이 공감했다. 게임을 하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살벌한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겁먹지만, 그 가운데서도 누군가는 주눅 들지 않고 나서 따지기 시작하고, 그를 따라 사람들이 총을 든 사람들에게 집단으로 항의하고, 결국 투표를 통해 자기들의 의사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상황은 아무나 떠올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정말로 놀라운 반전이다. 하지만 작가가 그런 상황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국가 폭력 앞에서 누군가 앞에 나가 항의하면, 한 사람의 항의가 만 사람의 함성이 되고, 끝내 투표를 통해 시민의 의지를 스스로 표현하게 된 것이야말로 우리가 이룬 역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역사를 살아온 예술가가 그런 기막힌 반전을 상상하는 것도, 그리고 그런 역사를 살아본 적이 없는 예술가가 그런 상황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도 모두 다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을 사는 한국의 예술가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마음먹기만 한다면 그들은 마르지 않는 역사의 우물에서 남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온갖 놀라운 장면들을 길어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가 예술적 상상력의 비옥한 토양이 되고 마르지 않는 샘이 되는 까닭은 단지 그 역사가 남들이 갖지 못한 고유성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한국의 근·현대사는 세계사의 비극적 진리가 드러나는 장소이다. 이는 백 마디 설명 없이도 '미스터션샤인' 한 장면이 잘 보여준다. 스물한 번째 에피소드에서 일본군 대좌 모리 타카시는 미군 대위 유진 초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도 제국주의자잖아. 넌 스페인과 전쟁을 했고, 미국은 필리핀을 가졌지. 일본도 일로전쟁을 승리하고, 조선을 가지려는 것뿐이야. 필연적으로 우등한 국가는 열등한 국가를 실망시켜. 미국은 필리핀을, 영국은 인도를, 일본은 조선을 실망시키지." 그뿐이겠는가. 지금도 중국은 티베트와 신장위구르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실망시킨다. 그러니 지금까지 역사는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그렇게 제국주의 국가들이 폭력으로 약한 민족을 침략해 온 역사였다.

그런 역사 속에서 한국은 특별한 자리에 있다. 왜냐하면 한국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제국주의적 침략의 교차로에서 갈가리 찢기면서 그 제국주의적 침략에 저항해 왔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우리가 선 자리를 이런 의미에서 '세계사의 하수구'라고 불렀다. 그 하수구를 정화하는 것은 단지 우리 자신을 치유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정화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 한국사가 지닌 세계사적 의미도 있다.

'미스터션샤인'은 한국의 역사가 지닌 이런 세계사적 보편성이 드라마를 위해 얼마나 비옥한 토양이 되는지를 모자람 없이 보여준다. 그 드라마는 남의 역사가 아니라 자기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만으로 세계사의 비극적 본질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비극적 역사를 넘어갈 수 있는 전망을 열어준다. 그것은 침략과 저항의 역사를 대비시키면서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역사의 법정으로 불러내지만, 그 법정의 판관은 법률이나 추상적 정의가 아니라 아름다움의 거울이다. 폭력과 권모술수가 아름답기는 어려우나, 사랑과 희생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미스터션샤인'은 구한말의 의병 전쟁을 단지 가해자의 폭력과 피해자의 대항 폭력의 대립이 아니라, 폭력과 사랑의 대립으로 그려낸다. 이로써 그것은 역사의 숨은 본질을 열어 보인다. 왜 아니겠는가. 동학혁명도, 3·1운동도, 5·18도 폭력과 사랑의 대립이었던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의 한복판에서 다만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저항하고 희생하는, 그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는 모든 사람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다만 보다 아름다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도록 고무한다. 국적과 신분을 초월해 그들이 서로 사랑했던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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