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의 '신파와 미학 사이'] 전쟁과 사랑 사이

@김상봉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입력 2022.04.05. 10:10

만물은 전쟁을 통해 생성 소멸한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가 일종의 전쟁인 셈이다

그러므로 문학이 삶의 가장 근원적인 

본질을 노래하는 것이라면 그것의 으뜸가는 

주제가 전쟁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서양에서 그렇게 천대받던 사랑이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예수의 가르침 때문이다

그가 사랑을 새로운 계명으로 선포한 뒤에, 

사랑은 여자들이나 하는 일이 아니라 

신의 일이 되었다

아마도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이어령 선생과 김수영 시인의 순수·참여문학 논쟁의 여운 때문이었겠지만, 나는 중·고등학생 시절 사람들이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을 구별하면서, 전자가 보편적이고 영원한 삶의 물음을 탐구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지금 여기 현실적 문제와 대결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 뒤 나는 오랫동안 순수문학이란 으레 황순원의 '소나기'나 김동리의 '저승새'처럼 지고지순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영원한 과제니까.

하지만 유학 시절 고전 문헌학 공부를 통해, 나는 이른바 순수문학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이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서양에서 모든 문학의 원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사랑이 아니라 전쟁을 노래한 서사시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시인이 사랑을 노래한 것은 근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이다. 그 이전에는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이 문학적으로 묘사된 것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나오는 디도와 아이네아스의 사랑 이야기가 거의 유일하다.

아이네아스는 트로이전쟁에서 패배한 트로이 장수인데, 새로운 땅을 찾아 자기 부족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그를 미워한 유노 여신이 풍랑을 일으켜 배는 이탈리아 해안에서 아프리카 해안으로 떠밀려 오고, 아이네아스는 거기서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와 사랑에 빠진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영국의 작곡가 헨리 퍼셀이 오페라로 만들었을 만큼 애틋한 데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아이네이스'의 중심 주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이네아스는 메르쿠리우스 신의 경고를 받고 전쟁과 정복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고 이탈리아로 떠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여성의 일이고 전쟁은 남성의 일이며, 사랑이 아무리 감미롭다 하더라도 전쟁에서의 승리보다 앞서는 가치일 수 없다는 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시인들이 공통적으로 견지했던 가치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왜 사랑이 아니라 전쟁이었을까?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전쟁이야말로 만물의 아버지이다. 만물은 전쟁을 통해 생성 소멸한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가 일종의 전쟁인 셈이다. 그러므로 문학이 삶의 가장 근원적인 본질을 노래하는 것이라면 그것의 으뜸가는 주제가 전쟁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에 비하면 사랑은 언제나 부수적인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네아스처럼 전쟁과 정복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는 것은 비극이지만, 우리는 그 비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에서 전쟁은 본질적인 상수이지만 사랑이란 부수적인 변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그렇게 천대받던 사랑이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예수의 가르침 때문이다. 그가 사랑을 새로운 계명으로 선포한 뒤에, 사랑은 여자들이나 하는 일이 아니라 신의 일이 되었다. 그리고 남자들 역시 신이 사랑하듯이 사랑하기 시작했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로미오는 줄리엣을 그리고 베르테르는 샤를로테를 죽도록 사랑했다. 그럼에도 사랑의 신이 전쟁을 끝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남자들이 신의 이름으로 전쟁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십자군이야 다 아는 이야기지만, 제주 4·3의 학살자들인 서북청년단 역시 영락교회 청년부가 모태였다. 그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학살했다. 그것을 생각하면, 철학자 헤겔이 영구평화론을 쓴 칸트를 몽상가 취급한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에 비하면 우리 시대 한국 드라마 작가들은 그저 변방의 시골뜨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는 언제나 변방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왜냐하면 중심에서 사는 사람은 세계를 근본에서 바꾸어야 할 아무런 필요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심을 동경하여 지향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 역시 지배적 현실이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가치를 추구하므로 근본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드라마 작가들은 전쟁이 본질적 상수이고 사랑이 부수적 변수라는 것을 자명한 공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시골뜨기다운 발칙함으로, 도리어 왜 사랑이 아니라 전쟁이 삶의 본질적 진실이어야 하는지를 집요하게 되묻는다. 함석헌은 전쟁을 본질적 상수로, 사랑을 부수적인 변수로 치부하는 세상에 맞서, 모든 싸움은 사랑싸움이라고 말했다. 전쟁조차 상처받은 사랑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과 불화는 사랑을 통해 극복되고 치유될 수 있고, 또 치유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대중 예술가들이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다. 그리고 이 낯설고 어리석은 믿음이 세상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에 붙는 신파라는 딱지는 바로 그런, 사랑에 대한 순진하고 어리석은 믿음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우리의 삶이 전쟁이라는 것은 '오징어게임'도 알고 있다. 그것은 가장 극단적인 데스게임이다. 거기서 나는 오직 남을 죽임으로써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징어게임'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전쟁 상황을 불가피한 것으로도, 자명한 것으로도 승인하거나 전제하지 않는다. 그 전쟁터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고, 다수가 원한다면 그 투쟁을 멈출 수도 있다. 그런 한에서 전쟁은 본질적 상수가 아니라 현실적 조건과 인간의 선택에 좌우되는 변수이다. 생사를 건 투쟁이 아무리 지배적인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변경 불가능한 존재의 본질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섯 번째 에피소드인 구슬치기 게임에서 보듯이, 극단적인 투쟁의 현장에서조차 기훈과 일남은 깐부를 맺고, 지영은 새벽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내어줄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시작된 전쟁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역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믿음을 재확인하면서 새로운 전쟁을 준비할 것이다. 나 역시, 다시는 누구도 이 땅을 넘볼 수 없도록 대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십 년 전에 끝난 전쟁을 두고도 종전선언조차 못하고 휴전상태를 사는 이 땅에서 탄생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전쟁과 분단이 극복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보여준다.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그리고 끝내 세상을 구할 것이다.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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