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의 '신파와 미학 사이'] 천재의 시대를 맞으며

@김상봉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입력 2022.01.04. 10:30

지난 몇 년 사이 조금씩 신문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나도 신문에 글을 쓰던 사람이었으나, 마지막에는 그것도 스스로 그만두었다. 신문을 보는 일이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론이 선동하지 않아도, 우리의 삶은 충분히 불행하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신문이나 방송 또는 인터넷 포털에서 접하는 세상 소식이 온통 비관과 증오의 잿빛 언어로 채워져 있으니, 바깥 세상의 불행에 더해 내면의 풍경까지 덩달아 우울해져 갔다. 하지만 그렇게 우울한 마음으로 세상을 밝게 만들 수는 없다. 세상을 밝고 행복하게 만들려면, 자기 자신이 밝고 행복해야 한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해야 한다. 역사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잃으면, 세상을 좋게 바꾸겠다고 동분서주하던 사람도 결국은 지치고 변절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는 머리 둘 곳도 없노라던 예수도 제자들에게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가르쳤고, 우리의 동학의 스승들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 앞에서도 공경과 성실과 믿음 가운데 믿음이 가장 먼저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니, 다시는 쓰지 않으려던 신문글을 다시 쓰게 된 지금, 나는 세상에 대해 필요한 비판은 다른 분들께 맡기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그리고 슬픔 속에서도 기쁨에 대해 말하려 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여러 해 전부터 나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한국인들에게 21세기는 천재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 세기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이라고 말해 왔다. 무슨 허황한 말인가 싶겠지만, 우리는 서양에서 학자들이 모두 라틴어로 학문을 하던 중세가 끝나고 모국어로 학문과 예술을 하기 시작한 뒤에, 한 백 년쯤 지나면 천재의 세기가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영국의 셰익스피어와 로크, 프랑스의 몽테뉴와 데카르트 그리고 독일의 칸트와 괴테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들은 느닷없이 출현한 천재가 아니고, 그들이 속한 민족공동체가 모국어로 학문과 예술을 하기 시작한 뒤에 일정한 성숙의 시간을 거쳐 영근 열매였다.

하지만 모국어로 학문과 예술을 한다고 해서 모든 민족이 똑같이 뛰어난 천재들을 배출하는 것은 아니다. 차이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 언어와 역사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말글이 달라지면, 세상도 다르게 보인다. 말글의 고유한 개성은 생각의 개성으로 나타나고, 말글이 담아내는 소리와 의미의 폭은 생각의 개방성과 보편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말글의 정밀함은 생각의 정밀함으로 나타난다. 말글이 열려 있으면 생각도 열려 있게 되고 생각이 열려 있으면 세상을 편견 없이 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편견 없이 열린 시야로부터 모두에게 공감을 주는 새로운 생각도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말글의 성격이 생각의 성격을 규정하기 때문에, 말글 역시 갈고 닦아야 한다. 어떤 민족이든 모국어로 학문과 예술을 하기 시작한 뒤에 일정한 성숙의 시간이 필요한 까닭도, 비범한 아름다움과 심오한 학문을 모국어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그렇게 말글을 갈고 닦는 과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차이를 낳는 또 다른 원인은 역사이다. 똑같이 모국어로 학문과 예술을 하더라도 어떤 역사를 살아왔느냐에 따라 민족의 정신세계가 달라진다. 이런 사정은 개인이나 민족이나 마찬가지인데, 부모 잘 만나 고생 없이 살아온 사람이 온갖 고생을 겪고 그것을 스스로 이겨낸 사람에 비해 아무려면 그 생각이 얕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축적한 국부에 기대어 걱정 모르고 살아온 민족이, 처절한 수난의 역사를 방탄소년단 노래 제목처럼 '피 땀 눈물'로 스스로 이겨낸 민족보다 그 정신이 더 심오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정신의 깊이는 오직 고통의 깊이이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우리의 역사를 수난의 역사로 규정하면서,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 놓고 나면 찢어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라고 탄식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세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나라가 된 지금, 이런 수난사관은 낯설게 보이지만, 세상에 어떤 다른 민족이 지난 200년 역사 동안 한국 민족보다 더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흘린 수난의 피, 저항의 눈물 그리고 근면한 노동의 땀은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정약종의 '주교요지' 그리고 최제우의 '용담유사'에서 한글이 학문언어로 쓰이기 시작한 뒤에 벌써 한 세기가 훨씬 지났다. 그 사이에 우리는 여러번 지옥을 다녀왔으나, 한국인들은 지옥에서도 남에게 배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자기 언어로 노래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베토벤의 음악을 두고 고통에서 환희로 나아간 기록이라고 칭송하지만, 한국인은 한 개인이 아니라 민족 전체가 절망적 고통의 가시덤불을 속에서도 만해의 시구처럼 "슬픔의 힘을 옮겨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어온 겨레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베토벤 같은 천재가 나오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소월이 '나의 집'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지나가는 길손을 눈여겨보며 그대인가고, 그대인가고" 기다렸다. 때가 되면 인류를 울리는 정신의 숭고와 깊이를 보여줄 사람이 우리 가운데서 나타나리라 굳게 믿으면서.

'기생충'에 이어 '오징어게임'이 온 세상 사람들을 울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내가 그렇게도 고대하던 천재의 세기가 오늘날 한국의 영상 예술가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실감한다. '오징어게임'이 그려보이는 세계는 그리스 비극이나 셰익스피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이다. 나는 그것을 다음 글에서부터 자세히 말하려 하거니와, 우리에겐 그리도 진부해 보이는 그 신파적 미학 속에서, 오랫동안 인류가 암중모색해왔지만 명확하게 직관하지는 못했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류의 확산은 그 전망이 보편적 설득력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니, 이 땅의 젊은 벗이여, 새로운 해를 맞으며 바라노니, 남루한 현실 속에서도 부디 꿈과 희망을 잃지 말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시라! 그대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 새 하늘 새 땅의 씨앗이 자라고 있으니. 김상봉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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