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걷는 가을 언덕길, 높은 하늘 닮은 詩들이 내린다

입력 2022.08.31. 17:23 이석희 기자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남구⑦] 사직공원-광주공원 시비(詩裨)
순수문학 시문학파 용아와 영랑
30~40대에 떠난 짧은 생애 기록
전망대 가는길 곳곳 시비 10여개
금남군·충장공·면앙정이 자리하고
기생 아닌 시인 황진이 추념 임제
80년 군부독재에 저항한 박봉우도
용아·영랑시비는 광주광역시 제1호 도시공원인 광주공원에 있다. 광주천변 빛고을시민문화관에서 성거사지 5층석탑을 지나 광주공원 노인복지회관 바로 맞은편 시인동산 돌계단 끝머리에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시비가 자리하고 있다.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남구⑦] 사직공원-광주공원 시비(詩裨)

◆가슴에 느낌이 있을 때 절로 우러나오고

'우리는 시를 살로 색이고 피로 쓰듯 쓰고야 만다. 우리의 시는 우리 살과 피의 매침이다. 그럼으로 우리의 시는 지나는 거름에 슬적 읽어 치워지기를 바라지 못하고 우리의 시는 열 번 스무 번 되씹어 읽고 외여지기를 바랄 뿐, 가슴에 늣김이 잇을 때 절로 읇허 나오고 읇흐면 늣김이 이러나야만 한다. 한 말로 우리의 시는 외여지기를 구한다. 이것이 오즉 하나 우리의 오만한 선언이다.'

1930년 봄, 첫 선을 보인 순수시 동인지 '시문학'의 편집후기에 나오는 용아 박용철(1904~1938) 글의 서두이다.

시는 살로 새겨 피로 써야하고, 가슴에 느낌이 있을 때 절로 우러나와야 하며, 그냥 슬쩍 읽어 치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외워 읊어야 하는 것, 그의 시론이 자못 비장하다.

이 '오만한 선언'은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공자가 주나라의 민요를 수집하여 편찬한 것이 '시경'이니, 시의 모태는 노래였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은, 혹은 모든 언어는 시의 상태를 동경한다는 말로 바꾸어 봄직 하며, 용아는 그 지고지순한 상태를 꿈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미친다.

우리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시문학파'는 용아와 영랑 김윤식(1903~1950)에서 시작된다. '나 두 야 간다'의 용아는 "내가 시문학을 하게 된 것은 영랑 때문이여"라고 말했고, '오~매 단풍 들것네'의 영랑은 "수리의 천재로 교사의 칭찬이 자자하던 때 나는 작은 악마와도 같이 그를 꼬여내어서는 들판으로 산길로 끝없이 헤매게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한 살 터울인 둘은 많이 닮아 있다. 영랑은 강진에서 오천석 대지주 김종호의 아들로, 용아는 이듬해 광주 송정리에서 대지주 박하준의 아들로 태어났다. 용아는 광주 '의향'의 뿌리로 회자되는 눌재 박상의 16대 손이다.

백호 임제 시비

◆팔 벌린 느티나무에 둘린 호젓한 정취

용아와 영랑은 휘문의숙을 거쳐 일본 동경 아오야마(靑山) 학원에서 만나 친구가 되고, 영랑은 수학에 천재성을 보였던 용아를 문학의 세계로 이끌어 둘은 시인의 길로 들어선다. '프로 시(詩)니, 무산문학이니 세상을 시끄럽고 하던 그때 말하자면 조선시의 정통을 찾고 발전을 바라야 신흥 조선 문학이 세계적 수준에까지, 라는 이상이 순수시지(純粹詩誌)를 계획케 하였던 것이니…'라고 훗날 영랑이 밝힌 대로 둘은 순수시 동인지 '시문학'의 창간을 주도한다. 여기에 정인보 변영로 이하윤 정지용의 참여로 창간호가 나왔고, 이어 김현구 신석정 허보가 뒤를 잇는다.

'시문학'은 용아가 사재를 털어 운영해 오다가 이듬해 3호를 끝으로 종간되지만, 이 땅에 순수문학을 뿌리내리게 한 모태가 되었다. 이런 발자취들은 2012년 강진 영랑생가 근처에 지은 '시문학파 기념관'에 잘 남아있고, 광주 남구 사직동 광주공원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시비(詩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비 왼쪽에는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라는 용아의 시 '떠나가는 배'의 첫 연이 새겨져 있고, 오른편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라는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끝 연이 새겨져 있다. '떠나가는 배'는 어딘가 정박지를 찾아 떠나가는 '배'에 인생을 비유한 용아의 대표작이며, 영랑의 '찬란한 슬픔의 봄'은 한국 순수시의 절창으로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다. 시비 뒷면에는 후두 결핵으로 34세에 떠난 용아, 한국전쟁 도중 포탄 파편에 맞아 47세에 떠난 영랑, 그들의 짧은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광주공원 올라가다 보면 현충탑 못미처 오른 편에 느티나무 가지가 팔 벌려 감싸듯이 호젓한 정취 속에 시비가 서 있다. 용아의 고향후배인 시인 손광은 등 광주문인들이 1970년 '한국 신시(新詩) 60년 사업'의 하나로 건립했다. 글씨는 서예가 서희환의 작품인데 전서를 한글에 접목시킨 서체가 고졸(古拙)하여 시와 잘 어울린다.

사직공원 박봉우 시비

◆평안도 도사 부임 길에 남긴 시 한편

사직공원으로 건너가면 양림파출소에서 전망대로 오르는 곳곳에 10여개의 시비(詩碑)가 늘어서 있다. 두루두루 읽으면서 느릿느릿 걸으면 좋을 길이다. 초입에 광주 금남로(錦南路)의 주인공이자 이괄의 난을 평정한 금남군(錦南君) 정충신(1576~1636)의 시조가 나온다. 공산(空山)이 적막한데 슬피 우는 저 두견(杜鵑)아/ 촉국 흥망이 어제 오늘 아니어늘/ 지금(至今)히 피나게 울어 남의 애를 끊나니. 소쩍새의 슬픈 울음 위에 일국의 흥망성쇠를 얹고는 나라를 걱정하는 무인으로서 화자의 감정을 이입하여 놓았다.

더 오르면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시조 '오우가(五友歌)'가 서 있다. 내 버디 몃치나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의 달 오르니 긔 더옥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삿 밧긔 또 더하야 머엇하리(하략) 고산이 해남에 은거할 무렵 지은 연작 시조집 '산중신곡'에 수록된 6수의 시조 중 첫 수이다. 내 벗은 물과 돌(水石), 소나무와 대나무(松竹), 그리고 동산에 떠오르는 달(月), 하여 다섯이다. 1수는 다섯 벗(五友)을 밝히는 총론이고, 제2~6수는 다섯 벗의 아름다움을 하나씩 노래하는 각론이다. 중학교 교과서에 나온다.

백호 임제(1549~1587)의 시비도 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두고 백골(白骨)만 무쳤난이/ 잔(盞)자바 권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 하노라

1583년, 임제가 평안도도사로 부임되어 가는 길, 개성의 청초 우거진 골짜기에 황진이의 무덤이 있다. 황진이는 임제 보다 한 세대 위다. 그냥 갈 수 없어 한 잔의 술과 한 편의 시를 남기고 간다. 이 일로 조정의 비판을 받고 파직되었다는 설이 전한다. 부임도 전에 기생의 무덤에 추념한다는 것은 유교사회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그녀를 기녀가 아닌 시인으로 보았기에 그랬을 것이다. 우리 문학사에 남을 아름다운 장면이다.

호남 유림의 좌장이자 면앙정 시단의 대부로 추앙받는 면앙정 송순(1493~1582)의 시비에는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가 새겨져 있다. 풍상(風霜)이 섞어 친 날에 갓 피온 황국화(黃菊花)를/ 금분(金盆)에 가득 담아 옥당(玉堂)에 보내오니/ 도리(桃李)야 꽃인 양 마라 임의 뜻을 알괘라

명종이 어느 날 대궐 정원의 황국을 꺾어 옥당관에게 주며 노래를 지어 올리라고 하였다. 갑자기 명을 받은 옥당관이 어찌할 줄을 모르자, 마침 수직을 서고 있던 송순이 이 작품을 지어 올렸다고 한다. 자신을 복숭아꽃 자두꽃으로 낮추고, 임금을 오상고절(傲霜孤節)의 국화로 높이니, 큰 상을 아니 내릴 수 없다.

광주공원 시인동산

◆임진왜란 최고 명장 애통은 무등에 묻혀

광주가 낳은 또 한 사람의 시인 추풍령 박봉우(1934~1990). 조선의 창호지에/ 눈물을 그릴 수 있다면/ 하늘만큼 한 사연을…/ 눈물 흘리지 말고/ 웃으며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하늘만큼 한 밤을…/ 조선의 창호지에 눈물을 그릴 수 있다면

시인은 망국과 식민과 전쟁과 분단, 그리고 독재로 이어지는 그 '하늘만큼 한 사연을'을 조선의 창호지 위에, 눈물 없이 눈물을 그리고 싶어 한다.

그는 시 '백두산'에서 무궁화도/ 진달래도/ 백의(白衣)에 물들게 하라/ 서럽고 서러운/ 분단의 역사/ 우리 모두를/ 백두산에 올라가게 하라고 노래했다. 시 '서울 하야식(下野式)'에서는 …꽃송이를 꺾으며 덤벼드는/ 난군(亂軍) 앞에/ 이빨을 악물며 견디었다/ 나는 떠나련다/ 서울을 떠나련다…고 쓰면서 군부독재에 분노하고 저항했다. '서울 하야식'은 1986년 나온 그의 시선집의 표제시이기도 한데, '꽃송이를 꺾으며 덤벼드는 난군(亂軍) 앞에 이빨을 악물며 견디었다'는 대목이 80년 광주를 대변하는 것 같은 절창이다.

이어지는 길에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용아와 영랑을 잇는 이수복(1924~1986)의 '봄비'가 서 있고,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너무나 유명한 이순신 장군(1545~1598)의 시비도 있고, …밤사이 비가 얼마나 휘몰아쳤는지/ 낙화는 뜰에 가득 눈물겹구나라고 쓴 눌재, 1515년 그의 단경왕후 신씨 복위소를 조광조가 '강상(綱常)을 바로잡은 충언'이라고 찬한 박상(1474~1530)의 시비도 있다.

그리고 충장로의 주인공 충장(忠壯) 김덕령(1568~1596)의 '춘산곡(春山曲)'.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붓난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내 업슨 불이 나니 끌 물 업서 하노라

저 산의 저 불은 끌 물이 있는데 이 몸의 연기도 내음도 없는 불은 끌 물이 없네, 이 몸의 불은 충(忠)이 역(逆)이 되는, '천불'이다. 김덕령은 29세에 절명하면서 이 한 수의 시조를 남겼다. 임진왜란 최고의 명장이 전장에서 전사하지 않고, 자국의 옥중에서 고문치사를 당하는 것이 조선의 비극이다. 동생 덕보가 상경하여 수레에 싣고 열하루 동안 끌고 내려온 그의 애통은 무등산 자락에 묻혀있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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